실패할 것을 알고도 했던 집짓기 [1]
실패할 것을 알고도 했던 집짓기 [1]
유은순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학예연구사)
고백하겠다. 필자는 팔복예술공장에서 양은경 작가의 작업 평론을 의뢰받고 잠시나마 자만에 빠졌다. 아픈 사람의 시간 경험에 관한 전시 《틱-톡》(2019, 온수공간)부터 비표준적인 몸을 가진 사람의 공간 경험에 관한 전시 《사이드-워크》(2021, 윈드밀), 사회적 소수자의 교차성을 탐구한 전시 SeMA 옴니버스 《나는 우리를 사랑하고 싶다》(2024,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에 이르기까지 정상성과 비정상성의 경계에 질문을 던지고 꾸준히 사회적 소수자의 경험에 관해 관심을 가져왔던 필자로서는 조현병에 천착해온 양은경의 작업에도 자연스럽게 관심을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집에도 관련된 몇 권의 책도 구비하고 있었다. 언젠가 이것에 관해 연구 혹은 전시로 무언가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짐작하고 있었고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양은경 작가와 미팅을 진행하면서 정신질환을 예술의 영역에서 다루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더욱 실감하게 되었다.
사실 예술과 정신질환은 깊은 연관성을 가져왔다. 주로 그것은 예술가의 일생을 보다 극적으로 만들어주는 장치였다. 반 고흐는 생전에 정확한 진단명이 확정되지는 않았지만 뇌전증, 조울증, 경계선 인격장애와 같은 질환이 의심되었고 자신의 귀를 자른 충격적인 행위와 때이른 죽음이라는 비극적 결말로 치달았다. 그의 정신질환은 예술성과 비례하여 예술가를 더욱 신화화하는데 일조했다. 특별함, 유일무이함, 기행으로 치환되기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손쉬운 선택일까. 현실은 보다 잔혹하다. 대다수의 정신질환 당사자는 사회, 가족, 친구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깊은 편견과 오해에 시달리고 소외된다. 정신질환, 특히 조현병의 경우 병명이 특정되고 장애인으로 등록되는 순간부터 사회와의 철저한 단절이 시작된다. 당사자가 겪는 질환의 어려움 외에도 개별의 주체성을 삭제당하고 그 자신으로서 인정받지 못한다는 어려움으로 인한 정신적 고통이 치료의 더욱 큰 걸림돌이 되곤 한다.
양은경은 2019년 캄보디아로 봉사를 하러 가면서 처음으로 사회·문화적 맥락에 따라 정신병에 대한 관점이 달라진다는 사실을 알았다. 캄보디아에서 만난 이들은 자신의 발목에 쇠사슬을 묶고 있을지언정 치료를 거부하지는 않았고 처방되는 약을 먹으면 크게 호전되었다고 한다. 가족이나 이웃들도 저마다 개별적인 의견은 다를지언정 그들과 단절하고 격리되어야 한다는 인식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이는 가속화된 자본주의, 신자유주의 이념에 따라 개인의 능력이 중요시되고 핵가족화, 1인 가구화되고 있는 한국 사회와 같이 ‘알아서 잘 살아야 하는’ 사회에서는 불가능한, 자본주의에 아직 물들지 않은, 마을 단위로 서로를 돌보는 공동체에서만 가능한 일처럼 보였다. 작가는 캄보디아에서 직접 접한 사례와 더불어, 1978년 바잘리아 법 제정으로 정신병원을 폐쇄하고 지역사회 중심으로 정신질환을 관리하는 이탈리아의 사례도 리서치와 관계자와의 인터뷰를 통해 알게 된다. 사회로부터의 격리가 곧 치료라고 믿는 한국에서 정신질환이 편견 없이 수용될 수 있을까? 혹은 예술을 통해 그것을 완화할 수 있을까? 양은경은 정신질환 당사자에게 깊이 박힌 낙인을 걷어내고 이들의 곁에서 말을 길어 올리고 재현의 문제에 질문을 던지며 영상 설치 작업에 임한다. 누구도 그에게 시키지 않았고, 도리어 몇몇은 그를 말렸다. 정신질환을 가진 동생을 둔 지인도 그랬다. 그러나 그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이, 성별, 인종, 신체적 조건이 사회 문화적으로 구성된 토대에 의해 낙인 지어지고 차별 받듯이 정신질환 또한 사회 문화적으로 구성된 토대에 의해 낙인 지어지고 차별받는다면 그것을 면밀히 따져보고 재고할 필요가 있다. 당사자 활동가인 클레어는 광인의 대척점에 있는 자를 일반인이 아니라 ‘비광인’이라고 명명한다.[2] 장애인의 척점으로 비장애인을 둠으로써 정상성과 비정상성에 대해 질문을 제기하듯, 그는 광인과 비광인이라는 대립을 통해 정상성과 비정상성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미쳤다는 것은 정체성이 될 수 있을까? - 광기와 인정에 대한 철학적 탐구』의 저자 모하메드 아부엘레일 라셰드에 따르면 ‘매드 정체성’은 광기를 병리화하지 않는 대항 서사로서 하나의 정체성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적어도 실패한 정체성이 아니라 논쟁의 여지가 있는 정체성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충분한 기간에 걸쳐 지속되면서도 인정을 요구할 수 있을 만한 논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저자는 정체성으로서의 광기가 사회적으로 용인될 수 있도록 서사를 부여함으로써 광기를 정돈하기를 제안한다. 그러나 그는 정신질환을 개개의 케이스에 따라 판단해야 할 문제로 규정하고 광기의 문제를 스펙트럼이 아닌 그레이드의 문제로 치환함으로써 일정 부분 한계를 가진다.
팔복예술공장 창작스튜디오 8기 결과보고전 《사라지는 순간, 남겨진 형상》에서 양은경은 긴 복도와 한켠의 작은 방을 활용한 다수의 설치 영상 작업을 선보였다. 입구에 리어 스크린으로 설치된 〈경계에 서서〉는 조현병에 대한 대중의 인식(“문제가 생기면 자꾸 호명되는 병의 이름”), 항상 삭제되고 거세된 당사자의 목소리(“이것의 현재를 사는 이들은 입이 없다”)로부터 새로운 가능성(“어떤 세계에서는 이 이름이 무겁지 않을 수 있을까요?”)을 모색하고자 한다. 작가는 “증거가 되지 못한 헛소리들”이라고 치부되는 소음에 주의를 기울이고 “경계에 서서 얼굴을 마주”하고자 한다. 이 영상에 흐르는 자막은 온전하게 보이다가도 때로는 뒤집어져 보이기도 한다.[3] 입구를 기준으로 이 작업이 방의 내부와 외부를 가른다. 일반 자막이 조현병을 외부자가 바라보는 시선이라면, 뒤집힌 자막은 조현병을 곁에 서서 보기로 한 내부자의 시선이다.
이 작품을 너머 안으로 들어가면 어슷하게 두 개의 화면이 설치되어 있고 프로젝터 앞에는 일정한 속도에 따라 회전하는 집 모양의 거울이 설치되어 영상을 이따금씩 가린다. 두 개의 영상은 <집 짓기>로 조현병 당사자와의 인터뷰를 담는다. 당사자는 화면에 나오지만 모든 인터뷰이들이 온전하게 나오지는 않는다. 그들 중 일부는 어깨와 팔, 다리 등 신체의 일부만 노출된다. 당사자의 프라이버시를 보호하기 위함이다. 인터뷰는 질환을 앓았을 당시 들렸던 목소리와 지금으로써는 이해되지 않는 행동들에 대한 고백, 자신의 신변이 노출됨으로써 겪을 일에 대한 우려, 입원과 퇴원을 반복한 역사가 여러 당사자들의 목소리로 진술되며 이는 중첩되거나 흩어져 일관된 서사로 구성되기보다 부분적이고 파편적으로만 인식할 수 있다. 이는 당사자가 동의한 부분만 담겨서도 있겠지만 조현병 자체를 하나의 총제적인 서사로 만드는 것의 어려움을 반영하기도 한다. 이와 더불어 영상은 지하철 승강장, 길가에 버려진 의자, 이동 중인 버스에서 바라본 희뿌연 풍경을 겹친다. 한 곳에 정주하지 못하는 당사자의 불안한 마음을 투영한다.
영상의 화면을 가리는 거울 오브제는 중층적인 함의를 가진다. 정신질환을 판정받은 당사자는 사회로부터 격리되는데, 주로 그 장소는 집이다. 그들이 가장 자유로울 수 있는 공간인 동시에 사회와 단절되고 고립되는 공간이다. 또한 비광인은 이들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이들의 생각과 감정을 알 수 없는 심연이기도 하다. 프로젝터의 빛을 가리며 화면에 내는 구멍은 비광인이 알 수 없는 미지의 영역이겠지만, 돌아다니면서 전시를 보는 관람객에게 그것은 다른 곳으로 통하는 문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미지의 영역이라고 해서 절망인 것만은 아니다. 무엇보다 양은경 작가 자신은 이 집이 본인이 만든 집이라고 한다. 마음먹고 길을 나서고 들어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환대의 공간인 것이다.
전시장 한켠의 작은 방에는 2채널 영상작업 <없지만 있고>(2025)가 양쪽 끝 벽에 투사되어 있고 이 화면과 함께 읽을 수 있는 글 <없지만 있는>(2025)이 놓여 있다. 하나는 작가가 오랫동안 라포를 형성하며 친해진 조현병 당사자 김순득님과 오랫동안 진행한 인터뷰 내용을 담고, 다른 하나는 작가가 몇 년간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느꼈던 소회를 담는다. 전시 공간 에서 우리가 하나의 채널을 보기로 결정하면 필히 다른 하나의 영상을 포기해야 한다. 영상은 같은 듯 다르게 흘러가며 이어진다. 그러나 그 이어지는 흐름을 연결하려는 시도는 이러한 구조적 한계로 인해 번번히 실패할 수밖에 없다. 한 영상에서는 습기로 인해 뿌옇게 된 창밖으로 흐르는 풍경을, 다른 영상은 역, 복도, 거리에 나란히 놓인 빈 화분과 의자, 재개발 예정지구와 거기서 발견되는 경고문과 널브러진 쓰레기를 포착한다. 언제나 있지만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 정주되지 않고 외면받는 곳, 것들. 생산성 없는 존재이자 위협을 가하는 존재라는 편견으로 자신이 머무를 곳을 찾지 못하는 이들에게 되돌아가려는 작가의 의지를 보여준다. 작가는 보여줄 수 없고 보여질 수 없는 이 이야기로부터 떠나지 못하고 계속 머무르면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음을 고백한다. 이번 전시는 작가 스스로가 실패하고 좌절하면서도 시도할 수밖에 없었던 자기 고백이자 의지를 담는다.
처음 이 글을 쓸 때는 여기에 미처 쓰지 못한 많은 질문들이 있었다. 예술의 영역에서 정신질환을 다룰 때, 갖가지 염려가 저절로 떠오르기 때문이다. 조현병 당사자와 인터뷰 자체를 하기 어렵다는 근본적인 문제부터 증상이 발현된 현재 상황에서 벗어나 정제된 언어로 구조화된 경험을 접하게 될 때 삭제되는 것들, 사회 시스템과 구조에 관한 이야기 등에 대해서 말이다. 이러한 많은 질문은 아직 양은경의 작업에서 답변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가 이 모든 질문에 답변할 필요는 없다. 그는 다만 여전히 조심스럽다. 작가는 이번 작업을 마지막으로 인터뷰를 끝내자는 순득님의 말에 안도했다고 한다. 이제 작업이라는 목적 없이 그냥 만날 수 있겠구나, 그렇게 생각했다고 한다. 양은경이 목도한 것들과 고민을 필자는 모두 다 알 수 없다. 그의 스튜디오 책상에 한 웅큼 돌돌 싸인 약봉지가 그동안의 마음고생을 암시하는 것도 같았지만, 공개비평에서 발표 도중 끝내 울먹거림으로 꿋꿋하게 발표를 마치는 그의 모습에서 연약함보다는 강인함을 보았다.
이 길은 분명 쉽지 않은 길이고 계속해서 정답을 찾아가기보다는 오답을 지워나가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지난한 여정이 될 것이다. 캐럴린 G. 하일브런은 『여성 쓰기』에서 여성 생애 서사가 존재할 조건은 “여성들이 집 안에서, 남성들의 이야기 속에서 더 이상 고립된 삶을 살지 않는 것, 그 조건이 충족될 때 비로소 여성 서사가 존재하게 된다”라고 지적한 바 있다. 여기에 “여성”을 “광인”으로, “남성”을 “비광인”으로 대체해 봐도 크게 다를 것이 없다. 소수자의 이야기는 언제나 고립되어 왔다. 언제나 평가절하된 말들은 소음이 되어 흩어진다. 그렇게 소음은 침묵이 되어 사라진다. 귀를 기울이는 것, 그 “근처에서 말하는 것”(트린 T. 민하)이 필요한 이유다. 작가는 자신의 주장을 앞세워 세계를 변모시키려 하지 않는다. 다만 조용하게 벽을 세우고 지붕을 만들고 자신의 영역에서나마 이들이 숨통을 틔울 수 있기를 바란다. 혼자 서서 맞바람을 맞으면 쓰러지기 쉽지만, 여러 명이 서서 바람에 맞서면 쉬이 넘어지지 않는다. 양은경이 자신의 집을 지었듯이, 우리 모두가 이런 집을 하나씩 짓는다면, 이들이 숨통을 틔울 수 있는 곳도 하나씩 더 늘어나지 않을까? 양은경의 작업이 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계속되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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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글 제목은 양은경이 이번 전시에서 선보인 영상작업 <집짓기>(2025)의 가장 마지막에 나오는 자막에서 따왔다.
[2] Clare, ‘Mad Culture, Mad Community, Mad Life’, Asylum: The Magazine for Democratic Psychiatry, 18:1 (2011), 16.
[3] 이 글에서 뒤집어진 자막은 기울임꼴로 표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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